1998.02  예술의전당

재일 오페라 가수 田月仙 이 부르는<고려산천 내사랑>

 

남이나 북이나/그 어데 살아도/  다 같이 정다운 형제들 아니련가/

동이나 서이나/ 그 어데 있어도/ 다 같이 그리운 자매들 아니련가 /

산도 높고 물도 맑은/ 아름다운 고려 산천/ 내 나라 내사랑아

 

전월선이 항상 부르고 있는<고려산천 내사랑>의 일절이다.

재외한국인으로서 공감과 그리움을 담아. 전월선은 언제.어디에서나 이노래를 부르고있다.

전월선의 열창을 들었던 수많은 사람들. 그중에서도 제외 한국인들은 분단된 조국의 현실과 어찔수없이

헤어진 가족과 친척을 생각 하며서 눈물을 흘렸다.그러나 이 곡을 만든작자는 과연 누구였는지. 실은 전혀 몰랐던것이다.

전월선씨는 도쿄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2세이다. 경상남도 진해에서 바다를건녀 일본에 정착하여 재일동포 1세로서 혼신의 힘을다해 살아가는부모의 뒷모습을 보면서.그녀는성장했다.,,부모님께서는 재일동포 1세로서 무일푼으로 시작했기 때문에,일본에와서는 그야말로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 아니였던가 생각됩니다. ,,

그러나 그녀 자신은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아가면서 정말로 남부럽지 않은 환경 아래서 성장했다.

유치원때부터 부모님이 사준 피아노로 연습하여 고등학교까지 지냈고.민족학교에서는 음악과무용에 심취하였다.

 조선 민족으로서의 자각과 자부심을 고취하기 위하여. 학교에서 모국어를 배우고,역사를 배워갔다

그리고 그 즈음에야 비로소 고등학교 졸업후의 진로에 관해서 고뇌하게 되였다.

민족 학교에서는 노래를 부르거나. 무용을하거나. 무대에 설 기회가 참으로 많았숩니다.

점차 무대의 감각이 익숙해젓다고나 할까. 에술적 장면으로 자신의 재능을 키워나가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된것입니다.

 재일동포 2세로서 가능한 한 국제적인 김각으로 살아가고 싶었던 전월선씨는 그러기 위해서는 음악의 길이 가장 좋지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느때부터인가 음악대학에 진학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민족학교에서 배워온 것들이 거의도움이 되지 않았다.한문. 고문을 근간으로하는 일본어와 일본사의 지식,더욱이 영어실력도 민족학교의 공부만으로는 결정적으로 부족했다. 음악의 능력이 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음악대학도. 실제로는 일본의수험제도의 틀속에 갇혀있던 재일 외국인에게는 엄청나게 좁은 문이었다   ·

그러한 어느날 그녀의 고뇌를 더욱 가중시킨것은 당시 아버지자 경영하던 사업이 기울어져 도산해버린 일이었다.

그때까지 어려움없이 자라온 그녀에계 처음으로 닥친 시련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전월선써는 음악에의 정열을 단념할수가 없어, 부모님에게 음악대학 진학의 소망을 간절히 부탁하였다. 그때부터 학교가 끝나면 매일같이 학비를 벌어가면서 수험공부를 하였다. 더욱이, 재수하여 한번 더

도전해본다는것은 상상할수도 없는일이었다.

이러한 피눈물나는 노력의 결과,전월선씨는 음악의 명문   (도우호우)學園大學에당당히 합격, 본격적으로 성악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오페라는 오캐스트라를배경으로 하여, 무대미슬도 있으며, 무용도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옴악이라기 보다는 종합예술이 아닐까요,,

어릴 때부터 연극이나 무용에 친숙했던 전월선씨는 음악가로서 스스로의 재능애 오페라가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대학졸업후는 二基會의 연구생이 되면서, 더욱 오페라가수로써 실력을 닦아가면서 프로로 데뷔하게되었다.    

그런데, 첫머리에  소개한 <高麗山川 사랑>의 작자를 우연히 알게된 것이였다.       

1996년 전윌선써는 로스엔젤르스의 오케스트라에 초대되었으며, 우연히도 당시 지휘를했던 지휘자가(고려산천 내 사랑>의 작자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재미 한국인인 치과의사 로광욱(盧光 ) 씨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1918년 평안남도의 남포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한 노광욱, 일제시대에는 음악가로서 활약했었지만.한국전쟁이 끝난 해에 도미하여 치과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머나먼 이국땅에서 조국을 생각하는 재외 한국인들의마음을 (고려산천 내사랑)이라는자곡으로써 표현한것이다.

 이 곡을 부르면 정말로 동포들은 누구나 눈물을 흘립니다.북이든 남이든 어디에 살든지 .조국을 생각하는마음은 하나입니다. 조국이 안정되었으면하는 바램 .빨리통일되었으면하는 바램.이산가족의문제 등은

20세기가 남긴 과제이므로  그누구라도 무관심하게 넘겨버리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재외 한국인들이 가진공통의 염원입니다. ,,

 1985년에 전월선씨는 평양에서 열린(세게음악제)에 초청된 세게 80개국의 음악가들과 공연하여 열광적으로 박수를 받았다.

그리고 1994.처음으로 한국의 무대에 서게 되었다.,서울정도 600년을 기념해 한국의 에술의전당 오페라 하우스에서 한국오페라단의 주최로 열린 이공연에서.전월선씨는 비제작곡의 (카르멘)의 주역으로 열연했다.

분단된 조국의 남과북에서 각각 음악가로서의 자신이 무엇인가의 역할을 했다는 만족감은 그후에 전월선씨인생에 커다란 버팀목이되고 있다.

지금 전월선씨는 눈코 뜰새 없이 바쁜나날을 보내고 있다. 오는128일 도쿄의 산토리홀에서 게최될 한일 공연 콘사트(아시아로부터 세계로)라는 행사를 성사시킨 이유때문이다.일본필하모닉 교향악단을 위시하여

일본에서는 오오꾸라 육끼에,아오야마 지에코,이가라시오사무,구리바야시 요시노부,한국에서는김영미,전월선,김영환,고성현 등 한일 두 나라의 정상급 오페라 가수들이  그 면모를 선보일 예정이다.무사시노합창단의코러스도 참가하여 그야말로 환상적인 한일공연이 실현될 것이다.

 스기나미구는 도교에서 과거로부터 문화인.지식인들이 많아 살고 있는 지역으로 유명하다.구내에 사무소를둔 일본필하모니교향악단과는 우호제휴 관계를 맺고 구민을위한 콘서트를 이곳 저곳에서 개최하는등 전국의 수많은 자치체로부터 주목받고 있다.

1991년에 스기나미구는 서울의 서초구와 우호자매관계를체결.시민차원의 국제교류에도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인생 80세 시대의 도래로.그저 손쉽게갈수 있는 가까운곳에서 뛰여난 문화에술을 즐기고싶다는시민들의 요구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전월선씨의 열렬한 펜증의 한 사람이기도한 모토하시 구청장은 한국을 방문할때는 언제나 그녀의 <고려산천 내사랑.의 cd를 선물로 가지고 간다고 한다. 금번의 한일콘서트에는.아리랑. .벳노래.의 합창도 연주될 것이라고 전해들엇다는 모토하시구청장은 은화한 표정으로 21세기를 항한 스기 나마구의 문화행정의 전망과 국제교류에관해서 열심히 말해주었디.

전월선씨는 일본의 시민사회속에 용화되어 나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음악이라는 세계공통의 언어를 무기로 재일동포 2생로서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과거 재일 한국인들은 일본사회의 민족차별이나

편견 때문에 고통스러운 생활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21세기를 눈앞에 둔 현재,재일 한국인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일본사회도 바야호로 국제화가 진전되여가고있는듯하다.최근까지는 결코 볼수없었

던 새롭고도 학실한 ,.들이 급소히 자라나가고 있는것이다. 전월선씨의 화사한 무대에는 ,음악을 통해 국경이라는 벽을 없에자. 라는프라마돈나의 메시지가 웅축되여있는것이다.